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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재테크

1400여년의 역사적인 건축물 김제 금산사 국보62호 금산사 미륵전 보물10점

by 헤라:) 2024.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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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금산사 미륵전 (국보 제62호)
  • 금산사 석등 (보물 제828호)
  • 금산사 오층석탑 (보물 제25호) 
  • 금산사 방등계단 ( 보물 제26호)
  • 금산사 육각다층탑(보물 제27호)
  • 금산사 노주 (보물 제22호)
  • 금산사 석등 (보물 제828호)
  •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 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4호)
  • 금산사 당간지주 (보물 제28호)
  • 금산사 석련대 石蓮臺 (보물 제23호)
  • 금산사 대장전 (보물 제827호)
  •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 金堤 金山寺 深源庵 三層石塔(보물 제29호)

 

 

김제 모악산 금산사

전북 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위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 15길 1 (금산면 금산리39 지번)
전화:063-548-4441
주차여부:가능

 

 

전북 김제의 금산사는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모악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절은 백제시대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백제 법왕 원년 (599)에 창건된 절로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진표(眞表) 율사가 이 절에서 출가했는데, 그는 절의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어서 미륵신앙 고려시대 토대를 세웠습니다. 이후에는 절의 역사적인 변천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의 재건과 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김제 금산사는 조선시대에는 지리적인 위치와 역사적인 중요성 등으로 한국 불교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찰이 재건되고 여러 명승지가 함께 발전하면서 불교 문화가 번영했습니다.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국권의 손실과 불교 탄압 등으로 인해 금산사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광복 이후에는 다시 복원과 보수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김제 금산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찰로, 그 위치와 풍광 뿐만 아니라 불교 문화의 자연 풍광 정교한 조각과 문양의 국보 보물 문화 유적물이 많은 사찰로  관광객들과 신도들이 찾는 명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산사 절경과 자연의 조화 역사, 불교적인 명상과 수행이 어우러진 장소로, 평화로우며 신성한 분위기의 경건한 느낌이 드는 곳입니다.   

금산사 미륵전 (국보 제62호)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 산호전, 장륙전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법당은 김제 금산사 내에 위치하며, 각 층마다 다른 명칭의 현판이 걸려있습니다.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이라는 명칭의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이는 '큰 자비와 보배의 전'으로 해석되며, 대자보전은 일반적으로 절의 중요한 법당이나 대웅전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라는 명칭의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이는 '용화(龍華)의 모임'으로 해석되며, 용화는 불교에서의 상징적인 지혜를 나타내는 개념 중 하나입니다.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명칭의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이는 '미륵불의 전'으로 해석되며, 미륵불은 불교에서 미래에 나타날 예정된 부처로, 자비로움과 지혜를 상징합니다.이러한 현판들은 금산사의 법당 내부의 구조와 목적을 나타내며, 절의 중요한 역사와 불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김제 금산사의 법당인 용화전은 아름다운 건축 양식과 구조로 유명합니다. 이 건물은 1층과 2층이 앞면 5칸, 옆면 4칸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크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습니다.내부 구조는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으로 되어 있으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안정된 느낌을 줍니다.이와 같은 아름다운 건축 양식과 구조로 인해 김제 금산사의 용화전은 많은 방문객들의 이목을 끌고 있으며, 불교 예술의 역사적 가치를 갖춘 세계적인 건축물로 손꼽힙니다.

 

금산사 석등 (보물 제828호)

금산사 대장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 석등은 대한민국의 보물 제828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이 석등은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전체 높이는 3.9m에 이릅니다.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주석(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습니다.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가람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은 이 석등이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임을 더욱 강조합니다.이러한 석등은 금산사의 역사와 불교 문화를 빛내는 중요한 유물로, 그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함께 간직하고 있습니다.

 

금산사 오층석탑 (보물 제25호) 

동제사리합과 작은 합 2점, 청동오층탑과 엽전 7점, 그리고 불상 8구와 동자상 1구 등의 금산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사찰성보문화재50選)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는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석탑은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하여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높이는 7.2m에 달합니다. 본래 기록에는 9층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현재 남아 있는 옥개석의 형태와 체감율 등을 생각하면 6층 이상이 손실된 것으로 보입니다.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정보이며, 실제로는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있습니다. 1971년 11월에 이 석탑을 해체하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 금산사 오층석탑 중장기"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되었다고 합니다.중장기 기록에는 이 석탑의 조성시기와 중건 상황, 관련된 인물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공백으로 남아 있던 조선 전기 금산사의 역사를 채우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한, 이 석탑 사리장엄구에는 조선 초기의 불사 진행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많은 불상들과 청동오층탑, 엽전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조선 초기의 불교 문화와 작품성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입니다.

 

금산사 방등계단 ( 보물 제26호)

금산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대에는 오층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계단戒壇이 있습니다. 이곳은 계단의 형식으로 된 지대에서 계단식의 기단이 쌓여 있으며, 이 위에는 사각형 모양의 돌이 올려져 있습니다. 그 위에는 석종형태의 석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계단戒壇은 계단으로 수계(受戒)하는 의식을 실시하는 곳으로, 방등계단은 스님과 재가신자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수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열린 계단입니다.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으며, 아래 기단 네 면에는 돌기둥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됩니다. 이곳에는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석종형태의 탑신을 받치는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연꽃무늬가 둘려 있습니다.

탑의 꼭대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하고 있습니다.방등계단은 독특한 조각 수법을 살펴보면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창하고 단을 열어 법시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어 방등계단은 진표율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방등계단은 수계법회를 거행할 때 중앙에 마련되고, 그 주위에 스님과 재가신자가 둘러앉아 계법을 전수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방등계단은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이곳은 계(戒).정(定).혜(慧)의 삼학 중 계(戒)를 중시하는 불교의 기본 토대를 나타냅니다.이렇듯 방등계단은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중요한 장소로서, 금산사의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한 신앙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금산사 육각다층탑(보물 제27호)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한 보물 제27호인 대웅대광명전 석탑은 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석탑입니다. 석탑은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습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로서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이 탑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습니다.이 석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입니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인 수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금산사 노주 (보물 제22호)

 

대적광전 오른쪽에 위치한 노주는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입니다. 노주는 원래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으나, 나중에는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왜 이 노주가 별도의 조성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기록의 일부가 소실 되어서 추측과 현존해있는 기록으로만 짐작하며

고려시대의 사중 기록에 따르면, '노주'는 사실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이 맞다면, 현재의 모습에서는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이 없어진 상태가 되겠죠. 이 노주는 고려시대의 조성 기법을 보존하고 있어서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금산사 석등 (보물 제828호)

대장전 앞에 위치한 보물 제828호는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입니다. 이 석등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전체 높이는 3.9m에 이릅니다. 석등은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이 얹혀져 있고, 그 위에는 간주석, 연화석,윗받침돌 화사석, 옥개석, 보개,지붕돌 보주 순서대로 조성되었습니다.

이 석등은 네모난 화창에 시설되었던 창문을 제외한 8각의 지붕돌전각의 귀꽃장식 꼭대기 머리장식 보주가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켜왔다는 점에서 귀중한 성보문화재로 평가됩니다. 석등은 그 은은한 빛으로 법을 밝혀온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석등은 금산사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 됩니다.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 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4호)

혜덕왕사 소현(1038-1096)은 고려시대의 고승으로, 금산사의 중창주였습니다. 11세 때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법상종을 계승한 지광국사 해린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079년에는 금산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진표율사의 중건 이래 가장 큰 규모로 금산사를 중창하였습니다. 그는 가람의 남쪽에 광교원을 설립하여 다수의 경전을 간행하기도 했습니다.혜덕왕사는 1096년 12월 18일에 금산사의 봉천원에서 입적하였고, 이에 숙종은 그를 위해 혜덕왕사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또한, 진응이라는 탑호를 세웠습니다. 비문은 인주이씨(이자연의 아들)가 작성하였으며, 음기에는 혜덕왕사의 문도와 관련된 110여 명의 승려와 1천8백여 명의 인물이 열거되어 있습니다.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혜덕왕사의 탑비는 현재는 귀부와 비신만이 남아 있으며, 비의 머리부분은 결실되었습니다. 비문의 글씨는 구양순법의 해서체로 약 2cm 크기로 작성되어 있으며, 활달하고 쾌적한 멋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비문은 심하게 손상되어 판독이 어렵습니다.서자와 찬자의 이름은 알 수 없고, 각자의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추정상으로는 이오가 짓고 정윤이 썼으며, 비음은 채추탄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귀부는 방형의 지대석위에 놓여 있으며, 역동적인 발과 비늘의 표현이 특징인 고려시대의 비석으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금산사 당간지주 (보물 제28호)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위치합니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열릴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으로, 당간(幢竿)이 깃발을 지탱하는 지주(支柱)를 받치고 있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되어 있습니다.

금산사 당간지주는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완성도가 높으며 보존이 잘되어 있어서 역사적 가치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당간 지주에는 세 곳의 홈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는 예시로서, 이러한 공통점을 통해 같은 조성연대로 8세기에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은 766년(혜공왕 2)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당간지주의 조성 시기를 추측 합니다.

금산사 석련대 石蓮臺 (보물 제23호)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는 보물 제23호인 석련대(石蓮臺)가 위치합니다. 이는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이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석련대로 불립니다. 이 대좌는 높이 1.67m에 이르고, 둘레가 10.3m를 넘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형의 연화대좌로,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석련대가 현재의 제자리에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옮겨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매우 거대하기 때문에 이동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제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경우, 고려시대 이후에 절이 중창되면서 석련대가 놓인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새로운 불상이 봉안되면서 석련대가 그 자리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점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견해는 이 석련대를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고 있지만, 충분한 역사적 증거가 없는 경우에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 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이 석련대의 경우에는 충분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할것입니다

금산사 대장전 (보물 제827호)

미륵전의 서쪽 정면에는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전각은 보물 제827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진표율사가 세운 건물이었는데, 미륵전을 중심으로 위치하며 정팔각원당형으로 만들어진 정중목탑입니다. 이 건물은 산개형의 층옥으로 지어졌고, 옥개 맨 꼭대기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가 덮여 있으며, 그 위에는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635년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이 건물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되었고,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현재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의 꼭대기에는 여전히 신라 시대의 목탑 양식인 복발과 보주 등이 잘 보존 되어 있습니다.

대장전의 삼면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한 풍경이 아니라 실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데, 몇 가지 예시로는 '오달국사 인명창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 '부설거사 도술담', '용파수상행', '희운선사 행적기' 등이 있습니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대장전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에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시주한 불상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금산사 대장전 꽃살문 >

금산사 대장전의 문살은 솟을빗꽃살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형식은 문살이 교차하여 형성된 육각형의 영역 안에 여섯 장의 꽃잎이 새겨져 있어서 관념적인 꽃을 형상화합니다. 꽃은 붉은색, 푸른색, 흰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으며, 같은 색상의 꽃들은 일정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자인은 대장전의 입구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참배객들에게 화려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금산사 수미단 백로>

금산사 대장전의 수미단에는 아름답게 조각된 백로가 있습니다. 이 건물 내부는 천장이 중앙에서 1단을 높여 우물천장 형태로 설계되었고, 보상화문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전면의 수미단은 높이 1.07m, 전면길이 4.0m, 측면 1.8m로 구성되어 있으며, 4단으로 나뉘어져 정교한 장식문양이 투조되어 있습니다. 바닥부터 제1단에는 용과 귀면 등이, 제2단에는 인물상과 꽃들이, 제3단에는 새와 꽃들이, 제4단에는 안상문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히 해오라기는 불단 정면 중앙부의 제3단에 새겨져 있는데, 해오라기는 길상적인 의미로 한 번에 순탄하게 급제함을 상징합니다.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 金堤 金山寺 深源庵 三層石塔(보물 제29호)

고려시대의 이 석탑은 높이 4.65m로, 전체적으로 신라시대 전형 적인 석조물을 띄고 있지만 옥개석이 넓고 낙수면의 경사가 급한 특징이 있습니다. 이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정방형입니다. 지대석은 거의 땅에 묻혀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습니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세워져 있으며, 처마의 양끝에서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상륜부는 노반 1석만 남아 있으며, 다른 부재는 모두 결실되었습니다.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장씩이나, 초층 옥신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2면은 우주가 있는 판석이며 다른 2면은 면석을 채웠습니다 2층 이상의 옥신에는 네 우주만이 표시 되어 있습니다

옥개석은 넓고 추녀 밑이 곡선을 그리며 반곡된 점이 특이합니다. 받침은 각 층마다 4단으로 되어 있으며 너비가 좁아 추녀 밑에 넓은 공간을 남겼습니다.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고 전각의 반전은 추녀 밑을 따라 평행합니다. 전체의 형태가 각 부의 체감률이 적어서 안정감을 잃고 있습니다. 또한 석재의 결구가 규칙성이 없고 각 부의 조각이 섬약합니다.

이 석탑은 심산에 위치하여 부재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시대적인 불교 신앙과 제작 양상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가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이미지 출처:위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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